ARCHIVES PRODUCER SCHOOL · ESSAY 07
공동체의 기억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
기록은 남겨지는 데서 끝나지 않고,
경험과 참여를 거쳐 다시 새로운 기록이 됩니다.
아카이브 프로듀서 스쿨에 참여하기 전까지 나는 아카이브를 주로 ‘무엇을 기록하고 어떻게 잘 남길 것인가’의 관점에서 생각해왔다. 박물관과 아카이브 관련 일을 하면서도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하며 그 맥락을 남기는 일이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APS에 참여할 때도 기록을 콘텐츠로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며 더 오래 고민하게 된 것은 기록을 남긴 다음의 문제였다. 잘 정리된 기록을 누가 보고, 왜 보며, 그것이 사람들의 일상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것인가. 기록의 완성도를 넘어 그것이 사람에게 도달하고 다시 움직이는 과정에 질문이 생겼다.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브랜딩 수업에서 다룬 “제조자의 관점이 아니라 소비자, 더 나아가 사용자의 관점에서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처음 기획안을 만들 때의 나는 ‘성북의 오래된 주택과 골목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요소가 있으니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지붕과 대문, 담장, 창문 같은 생활건축의 요소를 기록해 카드와 스티커 등의 굿즈로 만들고, 골목의 식물과 오래된 집을 연결한 지도와 산책 코스로 확장하는 아이디어도 그 마음에서 시작했다. 기록을 연구자료나 데이터베이스 안에만 두지 않고 사람들이 손에 쥐거나 직접 걸으며 경험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과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고 싶은 것’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계속 생각하게 됐다. ‘성북의 옛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막연한 대상만으로는 프로젝트를 지속하기 어렵다.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아 자신의 기억을 덧붙일 수 있는 주민과 성북의 골목을 처음 걷는 방문객은 같은 지도를 보더라도 원하는 정보와 경험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카이브에 진입할 수 있는 경로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집의 표정 카드’가 처음 관심을 갖게 하는 입구라면, 산책 지도는 실제 장소를 찾아가는 경험이 된다. 그다음에는 자신의 기억이나 사진을 다시 남기는 참여로 이어질 수 있다. 수업에서 배운 UX와 퍼스트 트라이얼(first trial)의 개념을 적용한다면 이 흐름을 더 구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이브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라졌다. 기록을 많이 모으는 것 자체보다 무엇을 남길 것인지 먼저 정의하고, 기록 사이의 관계와 맥락을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특히 와닿았다. 오래된 집 한 채의 사진만 남기는 것과 그 집의 대문과 담장, 골목에 놓인 화분,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의 이야기, 주변 공간의 변화까지 연결해 보여주는 것은 전혀 다른 기록이 된다.
내가 관심을 가진 생활건축 역시 개별 건축물의 형태를 기록하는 데서 그치지 않아야 했다. 그 공간을 사용해온 사람과 골목의 생활 풍경까지 함께 연결할 때 비로소 “왜 이 기록을 남기는가?”를 설명할 수 있었다. 헤리티지를 고정된 물리적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공동체가 기억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바라본 수업도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다.
기록에서 경험으로, 경험에서 다시 새로운 기록으로.
그래서 앞으로 이 프로젝트를 단순한 ‘성북 생활건축 굿즈 제작’에서 끝내기보다 작은 지역 아카이브가 계속해서 기록을 만들어가는 구조로 발전시켜보고 싶다. 먼저 성북의 생활건축을 지붕·대문·담장·창문처럼 몇 가지 요소로 나누어 기록하고, 각각의 위치와 촬영 시점, 공간에 얽힌 이야기를 최소한의 정보와 함께 축적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카드와 책갈피, 지도를 만들되 모든 결과물이 다시 원래 기록으로 이어지게 하고 싶다. 카드나 지도에 QR을 연결해 해당 장소의 과거 모습이나 주민의 기억을 볼 수 있게 하고, 직접 골목을 걸어본 사람이 새로운 사진이나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다면 ‘기록→콘텐츠’라는 일방향 구조는 ‘기록→경험→새로운 기록’이라는 순환 구조로 바뀔 수 있다.
아카이브가 수집과 정리에 그치지 않고 활용되며, 그 활용에서 생겨난 새로운 활동이 다시 기록으로 축적되는 과정. 이것이 앞으로 가장 실험해보고 싶은 부분이다. 기록을 소비하는 사람과 기록을 만드는 사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아카이브를 경험한 사람이 다시 다음 기록의 주체가 되는 구조를 만들어보고 싶다.
굿즈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기록을 친숙하게 보여주기 위한 결과물 정도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굿즈 자체보다 그것이 사람과 기록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북의 대문이나 담장 패턴을 활용한 책갈피 한 장이 단순히 예쁜 상품으로 끝나지 않고 사용자가 실제 장소를 찾아보고 그 이야기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 역시 아카이브를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록을 예쁘게 가공하는 일이 아니다. 기록이 가진 진정성과 맥락을 유지하면서도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콘텐츠와 굿즈는 기록을 대신하는 결과물이 아니라, 사람을 다시 기록의 자리로 안내하는 입구가 되어야 한다.
APS를 통해 완성된 하나의 정답을 얻었다기보다 처음 제출했던 기획안에 더 많은 질문이 생겼다. 누가 이 기록을 필요로 하는지, 첫 경험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지역 주민은 단순한 기록 대상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 일회성 결과물이 아닌 지속적으로 축적되는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해 어떤 구조가 필요한지 앞으로 더 구체적으로 고민해보고 싶다.
처음에는 ‘성북의 오래된 집을 어떻게 기록할까’에서 시작한 아이디어였다. 지금은 ‘사람들이 성북의 생활건축을 어떻게 발견하고 경험하며, 다시 자신의 기억을 보태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됐다. 이 질문을 APS 이후에도 계속 가져가며 실제 프로젝트로 발전시켜보고 싶다.
사람들이 함께 의미를 만들고 다음 기록을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