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PRODUCER SCHOOL · ESSAY 03
무엇을 모을 것인가? 왜 모으는가!
무엇을 모을 것인가만이 아니라, 왜 모으는가를 묻게 되었습니다.
“너무 좋은 프로그램이다. 그렇지만 8주 동안 매주 출석은 어려울 것 같은데…. 무리겠지?” 아카이브 프로듀서 스쿨 공고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이었다. 흥미로웠지만 일정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가, 며칠 뒤 존경하는 멘토님이 이 프로그램을 추천해 주셔서 다시 참여를 고민하게 됐다. 모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힘이 닿는 만큼 해보자는, 나로서는 조금 의외의 선택을 했다. 마침 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아카이브’라는 것 자체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다.
몇 년 전 울산 장생포에서 ‘장생포를 가꾸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뷰와 전시, 이른바 아카이빙 작업을 해본 적이 있다. 당시 우리의 목표는 비교적 분명했다. 장생포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되었고, 주민들은 인터뷰에 익숙해 보였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듣는 사람들이 “오오” 하고 반응하는지도 알고 계신 듯했다. 물론 오래 살아온 분들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최근에 장생포를 오가거나 살게 된 사람들, 이곳에서 일하거나 관계를 맺으며 지역의 새로운 일원이 된 사람들은 장생포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인터뷰를 하고 영상을 찍고, 인터뷰집을 만들고 전시도 열었다. 그런데 모든 일이 끝난 뒤에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남았다. “좋은데 무언가 아쉽다”는 피드백도 받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카이브란 무엇일까. 인터뷰하고 기록하는 일과 아카이브는 무엇이 다를까. 기록이 정말 의미 있는 결과물이 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런 마음으로 신청을 망설이다가, 충남 공주에서 운영하는 우리의 책방 겸 작당 공간 ‘나나소사이어티’에서 멤버와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집에 돌아와 결국 신청서를 냈다. 오전 세 시 반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잘한, 천만다행의 선택이었다.
기획의 출발점은 나나소사이어티에 있는 ‘공간의 각주’였다. 공간에 남은 사물과 흔적에 짧은 이야기를 붙이는 작업이다. 오래된 문에 남은 강아지 발톱 자국, 이전 가게에서 쓰던 탁자,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물건들에 설명을 붙이면 사람들은 그 흔적을 전과 다르게 보고 자신의 기억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각주가 기억을 꺼내고 시간과 사람을 연결하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나에 있는 공간의 각주처럼, 공주 전체로 공주의 각주를 하는 거 어때?” 언제나처럼 툭 던진 루미의 한마디를 들었을 때, 이 동네 곳곳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궁금하고 설렜다. 그렇게 ‘공주의 각주’라는 생각이 시작됐다.
APS와 함께 두 달 반을 보내며 바뀐 것은 아카이브에 대한 질문과 기획의 깊이였다.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에서 멈추지 않고, 누구에게 필요한 기록인지, 이 기록은 어떤 경험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나는 왜 이 작업을 하고 싶은지를 계속 묻게 됐다. 매주 금요일 스쿨을 다녀오면 기획안을 다시 다듬고 좁히고, 때로는 뒤엎었다. 짧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 과정이 오히려 몰입을 도왔다. 동료들의 아이디어가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들으며 내 기획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다시 볼 수 있었다.
가장 오래 품고 있던 질문은 “이걸 왜 하고 싶지?”였다.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는 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프로젝트로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건네고 싶은지, 무엇을 기억하고 공감하게 하고 싶은지, 어떤 가치와 방향을 가지고 아카이빙을 하려는지. 아카이브가 기록 가운데 가치 있다고 판단한 것을 남기고 기억하고 공감하며 새로운 전망을 이끌어내는 행위라면, 더욱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대상에 대한 고민도 컸다. 공주의 각주는 관광객을 위한 것일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까. 처음에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할수록 어느 한쪽만 선택할 수는 없었다. 공주는 누군가에게 잠시 쉬러 오는 여행지이고, 누군가에게는 계속 살아가는 생활의 장소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공주는 뭐가 없어서 좋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너무 많이 꾸며지지 않은 여백과 천천히 걸을 수 있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는 뜻에 가까울 것이다. 처음 공주가 내게 산책과 쉼의 기쁨을 가져다주었듯, 그 감각이 오래 남기를 바랐다.
원도심 도시재생과 관광 활성화의 흐름 속에서 제민천 일대에는 새로운 공간과 사업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익숙했던 풍경이 바뀌고 사람들의 말 속에 남아 있던 기억이 쉽게 흩어져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공주의 각주는 이 변화의 물결 속에서 건물과 가게뿐 아니라 동네 곳곳에 얽힌 기억과 이야기를 꺼낼 단서를 모으는 프로젝트다. 그리고 그 단서를 소재로 새로운 이야기가 다시 쌓이고, 지역 콘텐츠의 재료로 순환하게 하려는 시도다.
누구에게 다시 가닿아야 하는가.
데모데이에서는 다양한 피드백을 받았다. 텍스트 중심에서 벗어나 사진이나 소리 같은 도구를 고민해 보라는 아이디어도, 운영을 누가 지속할지 더 구체화하면 좋겠다는 조언도 있었다. 부족한 점을 새삼 느꼈지만 이 기획을 더 발전시킬 수 있겠다는 기대도 생겼다. 결과와 상관없이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었기에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끝까지 매듭지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는 실행 방식은 거창하지 않다. 산책 다이어리나 각주가 놓인 장소를 표시한 지도처럼, 사람들이 공주 곳곳을 걷다가 잠시 멈춰 자신의 기억을 적고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읽게 하는 작은 도구들이다. 먼저 산책 다이어리를 파일럿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 공주 골목길을 걷는 사람이 각주를 발견하고 감상이나 기억을 남기면, 그것이 다시 다음 각주의 실마리가 되는 방식이 실제로 가능한지 확인해 보려 한다.
이번 과정을 지나며 새삼 알게 된 것도 있다. 나는 여전히 완벽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며, 미완성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APS에서 가장 도움이 됐던 것은 그 미완성 상태를 계속 공유해야 했던 경험이었다. 덜 정리된 생각을 꺼내 피드백을 받고 다시 고쳤다. 넓어지면 좁히고, 막히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완성된 결과물보다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조금씩 자라는 느낌이 즐거웠다.
마지막 날, 굿즈에 대해 강의해 주신 김희영 선생님이 모두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씩 주셨다. 한국아카이브재단 로고가 새겨진 검고 맨들맨들한 돌이었다. 그냥 두면 돌은 차갑지만 손에 오래 쥐고 있으면 서서히 온기가 스며든다고 했다. 그 돌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과 기록도 그런 게 아닐까. 그 자체로 이미 의미가 완성되어 있기보다 누가 어떤 관점과 애정으로 오래 쥐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른 온도를 갖게 되는 것.
나는 아직도 아카이브가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을 모을 것인가만이 아니라 왜 모으는가. 누구에게 다시 가닿아야 하는가. 어떤 기억이 다시 말을 걸 수 있게 할 것인가. 공주의 각주는 그 질문을 공주 원도심에서 작게 실행해 보려는 시도다. 작게 만들고, 물어보고, 다시 고치면서 조금씩 알아가 보려 한다.
